Nurses without faces

얼굴없는 파독 간호사…시대의 자화상을 담다

[헤럴드경제=이한빛 기자] 동료들과 카메라 앞에 섰다. 고향을 떠나 독일에서 간호사로 살고 있지만, 부산 똑순이 여기서도 똑순이로 잘 살고 있다고 가족에게 알리고 싶었으리라. 20대 여성들의 밝은 재잘거림 뒤로, 알 수 없는 긴장감이 화면에 가득하다. 10여년 전 어머니의 옷장에서 한복과 빛바랜 사진들을 발견한 작가 헬레나 파라다 김은 자신의 어머니와 파독 간호사들을 캔버스로 불러들였다. 대신에 얼굴은 지웠다. 특정인의 초상이 아닌 한 세대의 초상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전시장에서 만난 작가는 스페인 출신 아버지와 파독 간호사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나, 어릴적부터 자신의 뿌리찾기가 과제였다고 했다. “제 아이덴티티를 찾아가는 것이 늘 고민이었어요. 이쪽(유럽)에서도 저쪽(한국)에서도 늘 이방인이자 경계인이었으니까요” 게다가 한복은 아름답기까지 했다.

회화중에서 초상을 주로 그렸던 작가는 그날부터 어머니와 한복을 그리기 시작했다. “세상을 떠난 사람들이 생전에 입었던 한복을 그리면서 실존과 죽음을 고민하게 됐죠” 초상은 한 인간의 실존 증거이기도 하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있으면 그 순간을 잡고 싶어요. 특히 죽은 사람의 한복을 그리며 고인의 존재를 강하게 느끼죠” 흰 저고리와 감색 치마를 입은 얼굴 없는 여성의 초상인 ‘성자 Ⅱ’는 고인이 된 이모를 기리는 작품이다.
한국적 소재지만 서양 전통화법 기법으로 그려냈다. 아버지와 함께 자주 찾았던 스페인 프라도 미술관에서 보았던 작품들에 영향을 받았다. 주제는 어머니로부터, 형식은 아버지로부터 받은 셈이다. 한복 입은 두 어린이를 그린 ‘세나와 라파엘’은 작가의 두 조카를 그린 그림이지만 17세기 스페인의 대표적 화가 벨라스케스가 그린 ‘시녀들(Las Meninas)’이 묘하게 연상된다. 멀리서 볼때는 사진처럼 선명하나 가까이서 보면 거친 유화의 붓질이 그대로 살아있는 17세기 바로크 양식을 따랐고, ‘시녀들’의 구도를 차용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전시를 기획한 초이앤라거 갤러리는 “헬레나는 현대 회화작가로는 드물게 서양미술사의 올드마스터 회화 스타일을 고수한다. 전통기법으로 현대사회 단면과 역사들을 담아내는 소재들 담아내 한 시대의 역사들 들여다보고 특정사건을 반추하는 힘이 있다”고 소개했다.

이번 전시는 안드레아스 블랑크의 작품과 함께 2인전으로 기획됐다. 대리석, 설화 석고, 현무암, 석회암등 전통적 조각 재료로 비행기, 비닐 봉투, 검은 트렁크와 하얀 와이셔츠 등 우리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일상적 오브제를 재현했다. 작가는 짧은 시간동안 소비되고 소모되는 물건들을 돌이라는 영구적 소재로 재탄생 시켜 찰나에 불과한 인간의 삶과 영원에 대해 질문한다. 전시는 3월 28일까지 서울 종로구 팔판동 초이앤라거 갤러리에서 열린다.